명현 소개
명현 소개(2-상용, 상호, 상조, 상보, 정휘, 석휘)
배상용 裵尙龍 : 1574(선조7) ~ 1655(효종6)
자는 자장子章, 호는 등암藤庵, 삼중대광 위준位俊의 18세손이며 증 병조판서 설楔의 장남이다. 기품이 출중하고 효우돈독孝友敦篤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 시 화왕산성에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전략을 논하고 동고록同苦錄을 지었으며, 임란 시 수군영 남해신에 고유문告由文, 이괄의 난에 도내 격문檄文, 정묘호란 시 통유문通諭文을 지었다. 병자호란 시 호소사 참모관號召使 參謀官으로 기무를 도왔으며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경계하여 덕德은 숨기고 의義를 행하였다. 미수眉 허목許穆 선생과 도의를 강론하였으며 수도산 중의 등암정사에서 학문을 연구, 사림의 종사宗師로 원근학자들이 배움을 구하였다. 조정에서 여러 관직으로 천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숭정처사崇禎處士로 고종考終하였다. 통훈대부 사복시정에 증직되었고, 경재잠해敬齋箴解와 문집 4권을 남겼다. 묘는 금수면 후리곡에 있고, 도천서원 등암영각에 제향하고 숭조대에 유허비가 있다.
배상호 裵尙虎 : 1594(선조27) ~ 1630(인조8)
자는 계장癸章, 호는 괴재愧齋, 삼중대광 위준位俊의 18세손이며 증 병조판서 설楔의 차남이다. 풍채가 당당하고 체격이 건장하며 타고난 자질이 출중하였다.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양 선생 문하에서 수학, 문장과 도학이 출중하였다. 1624년(인조 2년) 사마시에 올라 성균진사시 3회 장의掌議를 지냈다. 개산開山 류석柳碩, 낙촌洛村 이도장李道長, 도헌都憲 민응협閔應協 등 명사들과 교유했으며 문집 2권을 남겼다.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 參贊官 春秋館 修撰에 증직되었다. 묘는 벽진면 원흥에 있고, 인산재仁山齋와 숭조대에 유허비가 있다.
배상조 裵尙藻 : 1596(선조29) ~ 1650(효종 원년)
자는 자결子潔, 호는 괴암槐庵, 삼중대광 위준位俊의 18세손이며 증 병조판서 설楔의 3남이다. 1612년(광해4) 문과에 급제, 예빈시 참봉에 제수되고, 강진, 인천 등의 수령을 지내며 선정을 펼쳐 청덕비淸德碑가 세워졌다. 1624년(인조2) 여주목사로 청렴결백하여 명성을 떨쳤다. 1902년(고종39)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겸 지춘추관 성균관 오위 도총부 도총관에 증직되었다. 묘는 대구광역시 동구 내곡동 여불산 사곡에 있다.
배상보 裵尙 : 1599(선조32) ~ 1653(효종4)
자는 국장國章, 호는 연정蓮亭, 삼중대광 위준位俊의 18세손이며 증 병조판서 설楔의 4남이다. 외조부 병조판서 황위黃瑋와 한강 정구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613년(광해5) 선교랑에 오르고, 선무사를 지냈으며, 습독관으로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모범을 보였다. 1635년(인조13) 훈련원 주부를 거쳐 명천현령 시 폐습을 혁신,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1636년 평안북도 후창부厚昌府의 서윤庶尹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묘는 성주군 가천면 중산리에 있고, 도산재道山齋가 있다.
배정휘 裵正徽 : 1645(인조23) ~ 1709(숙종26)
자는 미숙美淑, 호는 고촌孤村, 삼중대광 위준位俊의 20세손이며 괴재愧齋 상호尙虎의 손자이며, 세위世緯의 아들이다. 미수 허목 선생의 문인으로 1673년(헌종1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무장현감을 거쳐 정언, 지평 좌승지 겸 수찬관, 경원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조정에서는 바른 말을 잘하여 전상지호殿上之虎라 했고, 강계江界 부사 시에는 세금을 줄이고 빈민을 구휼하여 그곳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공을 잊지 않았다. 1697년 고향에 돌아와 회로당會老堂을 건립하여 향약鄕約을 강론하고 풍속교화에 힘썼다. 또한 오잠성리학五箴性理學, 변화기질설變化氣質說, 습정설習正說, 문설文說 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식호정式好亭을 지어 5형제의 우의를 다졌다. 십절十絶의 제명록題名錄과 문집 5권이 있다. 필법이 정묘하여 많은 비문碑文을 남겼다. 묘는 성주읍 금산리 지남동에 있다.
배석휘 裵碩徽 : 1653(효종4) ~ 1729(영조5)
자는 미여美汝, 호는 겸옹謙翁, 삼중대광 위준位俊의 20세손이며 등암藤庵 상룡尙龍의 손자이며, 증 좌승지 세면世綿의 아들이다. 타고난 성품이 성실하고 인정이 많았으며 명민明敏하여 학문이 깊고 해박하였다. 항상 효우로써 근본을 세우고, 언행을 삼사했으며 가풍을 몸에 익혀 집안을 다스리는 데 법도 있게 하였고, 근면검소勤勉儉素하여 후손에 모범이 되었다. 예빈시별제禮賓寺別提를 지냈으며, 유고遺稿 2권이 있다. 묘는 중산리 금파곡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