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현 소개
명현 소개(1- 현, 치, 덕문, 설, 건, 즙)
배현 裵俔
자는 중성仲成, 호는 수당修堂 삼중대광 위준位俊의 9세손이다. 공은 자헌대부 공조판서 진손晉孫의 삼남으로, 1396년(태조5) 성균진사成均進士에 합격하여 덕을 세우고 학문을 크게 이루어 성균관에 나아가 학생들을 가르치니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모범이 되었다. 만인이 공의 성덕을 흠모, 존경하였다. 묘가 실전되어 도남재 북쪽에 보사단비報祀壇碑를 세워 매년 음력 10월 14일 향사를 올린다.
배치
고려 삼중대광 위준位俊의 11세손이며, 웅雄의 자이다. 세종조에 무과 별시에 급제하고 훈련원 첨정과 울산, 함안 등 군수를 지내고 절충장군 행 경상좌도 수군첨 절제사折衝將軍 行 慶尙左道 水軍僉 節制使 등을 지냈다. 3개 고을 수장을 지냈음에도 집은 비가 새고 바람을 막지 못하여 추위에 떨었다. 청렴 결백하여 세인들이 청백리淸白吏로 추앙하였다. 묘는 금수면 명천리 주현에 있다.
배덕문 裵德文 : 1521(중종21) ~ 1603(선조36)
고려 삼중대광 위준位俊의 16세손이며 경릉참봉 주綢의 아들이다. 자는 숙회叔晦, 호는 서암書巖으로 천품이 온화하고 공손하며 자혜스럽고 품위를 지켰다. 공은 칠봉七峰 김희삼金希參 선생 문하에 수학, 1553년(명종8)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주서와 기주관, 형조낭관, 한성서윤을 역임한 후 언양·영덕·울산·고부 군수를 역임 후 한강 정구, 동강 김우옹 양 선생과 도의를 강마하였다. 임진왜란 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성주목사 제말諸沫을 살해하고 적승 찬희贊熙를 수령으로 삼자, 68세의 노구老軀로 창의倡義, 의병제독義兵提督이 되어 왜병의 앞잡이 승려인 찬희를 목 베고 부상진 전투에서 적장 구로다 구싱을 격살하였다. 이 전투에서 대검 2자루와 금부채를 노획하고, 성주성을 탈환하여 사재감정司宰監正에 승진되고 선무원종2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예문 홍문관 대제학 오위 도총관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藝文 弘文館 大提學 五 都摠管에 증직되었다. 묘는 송동에 있으며, 숭조대에 신도비神道碑가 1920년에 세워졌으며 유사 1권을 남겼다.
배설 裵楔 : 1551(명종6) ~ 1599(선조32)
고려 삼중대광 위준位俊의 17세손이며 증 이조판서 덕문의 장남이다. 자는 중한仲閑, 호는 서강西岡으로 용력과 국량이 출중하였다. 공은 1583년(선조16) 별시무과에 급제하여 주부에 승진, 임진왜란 시 초유사 김성일金誠一 가장으로 전공을 세우고 부상진 전투에서 의병장 부친의 지휘하에 구로다 구싱을 목 베고, 개산진에서 소 요시토시를 격파하고, 합천군수를 거쳐 동래현령, 부산첨사를 역임하였다. 진주목사 재임시 선정을 펴서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1595년(선조28) 경상도 수군절도사 겸 부원수로 군정軍政을 바르게 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 두 상국이 간성干城이라 칭송하였다. 밀양부사를 거쳐 선산부사 겸 금오산 별장으로 금오산성을 쌓고 구정칠택九井七澤을 파고 혜창惠倉을 설립하여 도체찰사都體察使의 본영이 되어 왜군의 북진을 막았다.
정유재란 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장작구선粧作龜船을 만들어 웅천해전에서 승리하고 칠천량해전에서 수군통제사 원균元均, 충청수사 최호崔虎, 전라수사 이억기李億祺 장군이 전사하였으나 경상우수사인 장군만이 치열한 전투 속에서 한산도 본영에 도착하여 청야작전을 수행, 백성과 전함 12척을 보전하여 명량해전 승리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선무원종 1등공신에 책록,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 훈련원사資憲大夫 兵曹判書 兼 知義禁府 訓鍊院事에 증직되었다. 묘는 금수면 주현에 있고, 숭조대에 신도비, 금오산에 사적비史跡碑가 있다.
배건 裵楗 : 1555(명종10) ~ 1592(선조25)
자는 수부守夫, 호는 고암高巖, 삼중대광 위준位俊의 17세손이며 증 이조판서 덕문의 차남이다. 성품이 단중端重하고 온화하였으며,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좌우명으로 하였다. 음직으로 선무랑宣務郞에 오르고, 임진왜란 시 형인 선산부사 설楔로부터 금산 여남현에서 만나자는 분부를 받고 병사를 거느리고 달려가다가 적군을 만나 치열한 전투 중 진중에서 부부가 순절하였다.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묘는 실전되어 후포에 묘단이 있고, 숭조대에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성주배씨 고암유허비
배즙 裵楫 : 1564(명종19) ~ 1598(선조31)
자는 통중通衆, 호는 명암明庵, 삼중대광 위준位俊의 17세손이며 증 이조판서 덕문의 3남이다. 기국이 넓고 뛰어났으며 용력이 출중하고 학문에 전념, 경서와 사기에 통달하였다. 1590년(선조23) 별시무과에 급제, 훈련원 습독, 사직에 제수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개산진에서 전공을 세워 선무사宣撫使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시 조방장으로 한산도에서 승리하고 도주하는 적을 쫓아 노량에 이르러 불어난 적군을 상대로 종횡무진 유린하다가 유탄에 맞아 순절殉節하였다. 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었고,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 兵曹參判에 증직, 의금부와 훈련원 지사에 추증되었다. 고령군 덕곡면 명곡 서우재에 묘소와 만모재晩慕齋가 있고, 후포의 숭조대에 유허비가 있다. <계속>